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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이자 독립운동가 였던 신익희 선생 생가 탐방기

 

 

 

 

경기도 광주 초월면
신익희 선생 생가 탐방기

 

 

 



2월의 하순으로 가는 날씨에 봄기운이 올라
야외로 일요일 기분을 내 보기로 했다.
남한 산성 쪽으로 가닥을 잡고 가는데 
가까운 곳에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가 있다길래 들렀다.
경기도 광주시 서하길 6-25 (초월읍)!
1956년에 작고했으니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인물이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익히 들은 이름의 인물이시다.
그의 생가라고 안내되는 곳의 대문을 들어 서니
정다운 우리의 멋스런 기와집들이 몇 채 모여 있다.
이 장소에서 200여 m쯤 되는 곳이 실제 선생의 
생가라는데 불이 나고 해서 현 자리에 복원했단다. 
아담한 기와집들이 사랑채 안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 뜰엔 선생의 붓글씨 서예 작품들이 비석에 남아 있다.
일필휘지의 달필이 한 눈에 범상치 않다.
나중에 자료를 검색해보니 글씨를 잘 써 9세 때에는 
현재 교육부 장관인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을 상품으로 받았다고 한다.
행초서로 남겨진 비문의 글들이 금세 허공을 타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독립운동과 정치인으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윤보선과 양자 유세 대결을 하다 1956년에
유세 도중에 뇌일혈로 안타깝게 사망을 했단다.
아마도 끝까지 대결을 했으면 우리는 
신익희 대통령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익희 申翼熙 (1894-1956)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수립 후 
내무차장·외무차장 등을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 되었다.

*출생-사망 1894.6.9 ~ 1956.5.5
*호 - 해공(海公)
*출생지- 경기 광주군 초월면 서하리

 

 

 

 

특히 글씨를 잘 써 9세 때에는 학부대신을 지낸 
이도재(李道宰)로부터 지필묵을 
상품으로 받기도 하는 등 명필가의 자질을 보였다.
*벗들과 손가락 잘라 피를 나눠 마시며 
독립운동에 목숨 바칠 것 맹세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경에 쫓겨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정 기초위원으로 활약
*“일본과 전쟁하려면 중국군과 함께 해야 한다.” 
중국 국민당군 중장이 돼
*한국 중국이 합작하여 국경의 일본군을 공격할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
*한국혁명당 세우고, 철혈단을 조직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준비
*“단일 정당으로 민족의 힘을 모으자.” 
민족혁명당, 조선민족전선연맹 결성에 차례차례 참여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외교와 선전 분야에서 일하다 중경에서 광복 맞아
*가슴 벅찬 환국…김구 주석과 함께 반탁운동…
건국 후 대통령 출마한 후에 작고

195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 가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사했다.

나라는 반드시 완전 독립되어야 하고(國家須完全獨立)
민족은 반드시 철저 해방되어야 하며(民族須澈底解放)
사회는 반드시 자유 평등하여야 한다(社會必須平等)
- 1945년 신익희 선생이 중국에서 -

 

 

 

정결하게 잘 보존되고 있는 선열의 생가를 통해
극도의 혼란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신 분의 일생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동량지재이셨던분이 62세라는 짧은 일기로
생을 마감하셨다는 게 후손으로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생가의 이모 저모와 명필로 칭송을 받으신 해공 선생의 유적들입니다.

 

 

만앙정

 


■해공 신익희 선생 경기도 광주 생가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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