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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사자성어글

이순신의 정신, 영웅의 덕목 차수약제 사즉무감!

일본의 이순신 李舜臣單騎にして胡虜の賊兵を破る。 和兵の至るに及んで全羅水軍節度使となる。 龜甲船を造る。忠勇鷄林に冠たり 이순신은 단기로 오랑캐 도적들을 무찔렀다. 일본군(和兵)이 (조선에) 도착하기에 이르러서는 전라수군절도사가 되었다. 귀갑선(거북선)을 만들었다. 충성스러움과 용맹함이 계림의 으뜸이었다.




성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장군! 

1545.03.08(양력)~1598.12.16(양력),  
53살의 나이로 노량해전 전사한 

우리민족의 신神같은 존재입니다.
장군의 일생을 한 날 한 날 되짚어 보노라면
어느 한순간도 목이 메이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국정농단으로 국가의 책임자가 부재중인 

작금의 나라 사정은 물론이려니와, 
한일간 위안부 문제를 비롯하여
현재 일본 정치 세력의 작태들은 용납할 수 없는 지경입니다. 
무능한 한국의 위정자들을 대신하여 장군의 한이 혼령으로나마
일본을 뒤 덮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의 수많은 어록 중에 두 가지 문장이 있습니다. 

이순신의 정신, 리더의 배짱, 영웅의 덕목을 볼 수 있는 

그의 심정을 대변한 글,
천지신명께 빌고 간절한 기도 후
이틀 후에 장렬히 전사하신 그의 유언은 

가슴에 남아 그의 혼령이나마 대하는 듯 합니다.






이순신의 정신


此讐若除 死則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이 원수를 없애 버린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노량 앞바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및 왜 수군 1천여 척이

서로 뒤섞여 격전을 치른 곳!!

1598년 음력 11월 18일 오후 6시경,
왜장 고니시 유니나카가 이끈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에서 정박하고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배들도 많았습니다.
충무공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약속하고서 
이 날 밤 10시경에 같이 길을 떠나
11월 19일 밤 2시경에 노량에 이르러 
왜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습니다.
충무공은 전선 약 150척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만 했고,   
이번을 최후의 전투로 장식해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17일 밤 자정에 천지신명께 빌었습니다.
"此讐若除 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노량해전은 조선과 명의 연합군과 왜적의 양측 함대가 

노량 해구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달빛도 없는 컴컴한 새벽 2시부터 시작된 

임진왜란 사상 가장 격렬한 전투!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왜적관음포가
남해도를 돌아나가는 해로로 착각해 포구 안으로 진입했다.
그러나 날이 밝자 포구 안에 갇힌 것을 안 왜군은
죽기 살기로 탈출할 길을 찾았다.
처절한 전투는 다음날 정오경에 끝났다.
그러나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말라!"며 독전하던
이순신 장군은 적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로 전사했다. 》




 

리더의 배짱


吾不死 則賊必不敢來犯矣 오불사 즉적필불감내범의


지금으로부터 419년 전 국가와 백성의 안위를 위해,  
자신의 어머니의 부고도 둘째 아들의 죽음도 돌보지 못했던 장군!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이자,
리더의 배짱이 스며 있는 어록 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吾不死 則賊必不敢來犯矣 (오불사 즉적필불감내범의)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요즘 말로 '심쿵'하는 리더의 배짱이

섬찟하리 만큼 든든한 버팀목 처럼 든든합니다.


 




영웅의 덕목

충무공 이순신의 충무(忠武)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운 군인이나 장군 등에게 내려졌던 시호이며,
그것을 높여 부를 때 충무공(忠武公)이라고 합니다.

"吾不死 則賊必不敢來犯矣 (오불사 즉적필불감내범의)
此讐若除 死則無憾 (차수약제 사즉무감) !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다."

 영웅의 덕목이 무엇인지를 

단 한 줄의 말씀으로 웅변해주고 있습니다.
작금의 위정자들의 입술에 발린 말과 
空約으로 혀를 스쳐 나오는 감언이설과는 
무게도 색깔도 장렬함도 비교할 수 없는 충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