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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사자성어글

이순신 업적과 명언 모음 및 임진왜란 / 충무공 어록 40선



이순신 李舜臣  
(1545.3.8(음력).(4.28. 양력)~ 
1598.11.19(음력).(양력 12.16) 
-53살의 나이로 노량해전 전사- 

성웅 이순신 장군! 
그의 일생을 점점이 알아 가다 보면  
이따금 목이 메이고 코끝이 찡해옵니다. 
53세 그가 평생에 남긴 명언이자 어록 모음 40선과, 
임진왜란의 배경 및 과정을 정리했습니다. 


이순신의 업적 

1. 일본의 침략(임진왜란)으로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해 낸 민족의 영웅이다. 
2. 세계 해전사에 유례가 없는 23 전 23승의 전적이다. 
3. 개량형 신무기인 거북선을 개발하였다. 
4. 시문에 뛰어나서 난중일기를 집필하여  
기록문화의 공로가 크다. 
5. 한국 역사상 후손들에게 가장 추앙받는  
애국애족의 표본이자 영웅이다. 


임진왜란 배경 

16세기 조선, 명, 일본의 3국이 얽혀 벌어진 임진왜란은  
동북아시아 질서를 뒤흔든 근세 최대의 국제전이었습니다. 
3국의 틈새에 놓인 조선은,  
일본과 명나라 군대까지 들어와 엉망이 되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조선 측 사망자는,  
18만에서 1백만 명으로 추정되며, 
66퍼센트의 경작지가 파괴되어 농사를 짓지 못해  
굶주린 조선 백성들은 인육을 먹으며 연명하는  
비극을 겪었다고 문헌에 전해집니다. 
이러한 용서할 수 없는 일본의 침략은, 
성웅 이순신 장군에 의해 저지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오시 사망으로 전쟁은 끝이 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순신이란 거목의 전사라는 슬픔이  
온 나라 조선의 백성을 통한케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의 생애를 대변하는 명언과 어록 40선! 
한자 원본과 함께 모아 그의 극진의 애국애족을 그립니다. 


이순신과 임진왜란 과정 

1592년 4월 13일 : 임진왜란 발발. 
*5월 7일 : 옥포 해전에서 이겨 가선대부로 승진. 
*6월 2일 : 당포해전에서 이겨 자헌대부로 승진. 
*7월 8일 : 한산도 대첩에서 이겨 정헌 대부로 승진. 
*9월 1일 : 부산포 해전 승리. 

1593년 1월 6일 :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되찾음.        
*2월 : 옥포 해전 승리. 
*8월 15일 :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됨. 

1594년 3월 4~5일 : 당항포에서 적선 31척 격파함. 
1597년 4월 13일 : 어머니 세상을 떠남. 
*7월 15일 :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삼도 수군이  
            대패하고 원균 사망. 
*8월 3일 : 삼도 수군통제사로 재임명. 
*9월 16일 : 명량 대첩에서 대승. 
*10월 : 셋째 아들 '면' 세상을 떠남. 
1598년 8월 18일 :  도요토미 히데오시 사망. 
1598년 11월 19일 : 이순신...
노량 앞바다에서 왼쪽 가슴에  
적의 총탄을 맞고 세상을 떠남. 


"戰方急 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53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시며 하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명언과 어록 40선! 


이순신 장군의 태산 같은 리더의 자질이 배인  
명언 어록 40선입니다. 

  
1. 丈夫出世 用則效死以忠 不用則耕野足矣.   
(장부출세 용즉효사이충 불용즉경야족의)  


"대장부로 세상에 나와 나라에서 써 주면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할 것이오.  
써주지 않으면 야인이 되어 밭갈이하면서 살리라."  


충무공이 1576년(선조 9) 2월 식년 무과에  
임용 발령을 조용히 기다리며 한 말로  
자신의 보직이나 출세를 위하여 권문세가에 출입하여  
아첨하거나 영화를 탐내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2. 在下者越遷 則應遷者不遷是非公也 且法不可改也   
(재하자월천 즉응천자불천 시비공야차법불가개야)  


"승진해야 할 사람이 승진을 못하고 순서를 바꿔  
아랫사람을 올리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또한 규정도 고칠 수 없습니다."  


1579년(선조 12) 2월 훈련원 봉사(정 8품)였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국방부 산하의 교육훈련 담당 부서이다.  
그때의 상관은 병부 정랑(정 5품, 지금의 과장급) 서익이  
자기의 친지 한 사람의 서열을 바꾸어  
참군으로 승진시켜야 된다면서  
인사 관계 서류를 잘 꾸며 달라는 청탁을 해왔다.  
이순신은 그의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끝내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여긴 까닭에  
서익의 청탁을 거절하였다.  
공명과 정의로써 불의에 대처한 공의 언동이  
당시 한성 훈련원 내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581년 12월 2년째 발포 만호로 있을 때  
서익은 군기경차관으로 내려와  
허위로 보고서를 만들어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3. 吾初出仕路 豈宜托跡權門謀進耶.   
(오초출사로 개의탁적권무모진)  

"벼슬 길에 갓 나온 내가 어찌  
권세 있는 집에 발을 디뎌 놓고  
출세하기를 도모하겠느냐." 

  
한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기 딸을  
이순신에게 소실로 시집보내려고 중매인을 보내어 
인척 관계를 맺으려 한 일이 있었다.  
병조판서라는 높은 양반이 이순신을  
사위로 맞이하겠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이미 그의 인품을 좋게 보았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자리에서 중매인을 돌려보냈고,  
권세와 돈을 따라다니는 아첨배나 부정한 방법으로  
출세하고자 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았다.   


4. 此乃公家物也裁之有年朝伐之不以公而以私可乎   
(차내공가물야재지유년 조벌지불이공이이사가호)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이것은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것이니  
하루아침에 사사로이 베어버릴 수 없습니다." 

  
이순신은 1580년 7월에 발포 만호 종 4품)로 근무하였다.  
발포는 지금의 고흥군 남쪽 해안 내발리이다.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사람을 시켜  
편지를 보내왔다.  
"내가 거문고를 만들고자 하니 발포영 객사 앞 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서 보내시오." 하였다.  
이순신이 이를 거절하니 성박은 노발대발하였으나  
이순신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5. 我與栗谷同性可以相見而見於銓相時不可竟不往   
(아여율곡동성가이상견이견어전상시불가경불왕)  

"나와 율곡은 성이 같은 까닭에 만나 볼 만도 하지만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는 것이 옳지 않습니다." 

  
선조 14년 서익은 군기경차관으로 내려와 허위로,  
"발포만호 이순신이 군기를 전혀 보수하지 않았으므로  
파직해야 합니다"라고  
장계를 올려 이순신을 파직시켰다.  
그러자 당시 율곡선생이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사간원 대사간인 서해 유성룡이 율곡선생을  
만나보도록 권고한 적이 있었을 때 나눈 얘기입니다.   


6. 箭筒則不難進納 而人謂大監之受何如也  
小人之納又何如也 以 一箭筒 而大監與  
小人俱受汚辱之名 則深有未安 柳相曰 君言是也   
(전통측불난진납 이인위대감지수하여지  
소인지납우하여야 이 일전통 이대감여  
소인구수오욕지명 측심유미안 유상왈 군언시야)  

"화살 통을 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사람들이 이를 보고 대감이 받는 것을  
어떻다 말하며,  
소인이 바치는 것을 어떻다 하지 않겠습니다?  
오로지 이 화살통 하나로 대감과 소인이 함께 
더러운 말을 듣게 될까 봐 그것이 두렵습니다." 

   
서익의 무고로 파직되었다가 1582년(선조 15) 5월에  
3년 전의 근무지였던 훈련원 봉사로 재직하게 되었다.  
당시 병조판서 유전은 이순신이 늘 들고 다니던  
화살 통을 보고 소유하고픈 생각에,  
"그 화살 통을 줄 수 없겠느냐"라고 물었을 때 
이순신이 위와 같이 언급하며 완곡하게 거절하자  
유전은 "그대 말이 옳다"라고 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러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그도 큰 인물임에 틀림없다.   
  

7. 死生有名 飮酒何也 不渴何必飮水  
   死則死耳 安可違道求生   
   (사생유명 음주하야 불갈하필음수  
   사측사이 안가위도구생)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인데, 술은 마셔 무엇하며,  
목이 마르지도 않은데 물은 무엇 때문에 마시겠는가?  
어찌 바른길을 어기어 살기를 구한단 말이오!"  


1586년(선조 19 1월) 함경도 조산원 만호(종 4품)으로 있었다.  
1587년 8월에는 함경도 최북단 두만강 입구에 있는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게 되었다.  
이해 겨울 여진족이 기병을 이끌고  
대거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특별한 방어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순신은 적은 병력으로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포로 된 자 60여 명을 탈환하기도 하였다.  
이때 병마사 이일은 호출하여  
문초 받을 때 선거이에게 한말.  
그러나 모든 잘못을 것을 이순신에게 전가하여  
백의종군케 하였다.   


8. 勿論有罪無罪 一國大臣在於獄中  
   而作樂於堂上 無乃未安乎.   
   (물론유죄무죄 일국대신재어올중 
   이작락어당상 무내미안호)  

"죄가 있고 없는 것은 나라에서 가려낼 일이지만  
한 나라의 대신이 옥중에 계신데  
이렇게 방에서 풍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1589년(선조 22) 7월 정언신이 나해 귀양지에서  
한성으로 다시 끌려와 옥중에 갇혀 있었다.  
이분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에 까닭 없이 연루되어  
65세에 죽었다.  
정언신(정여립과 9촌)은 이순신에게는  
은사요 상관이었으며 또 평소에 존경해 왔던 분이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읍에서  
한성의 옥에 갇혀있는 정언신을 문병하였다.   
  

9. 吾寧得罪於濫率 不認棄此無依   
(오병득죄어람솔 비인기차무의)  

"내가 차라리 식구를 많이 데리고  
온 죄를 입는 한이 있어도  
이 의지할 곳이 없는 것들을  
돌보아 주지 않을 수 없다."  


1580년 둘째 형 요신(堯臣)이 먼저 죽고  
이듬해에는 큰형 희신(羲臣)마져 죽으니  
두 형의 자녀들은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마침 충무공께서 정읍 현감으로 있을 적에  
함께 있게 되었다.  
박 생원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남솔(濫率)이라고 고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10.而爲遮遏海寇 莫如舟師 水陸之戰 不可偏廢.   
(이위차알해구 막여주사 수륙지전 불가편폐)  

"바다로 침입하는 왜적을 저지하는 데는  
수군을 따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수군이나 육군은 그 어느 쪽도 없앨 수 없습니다."  

임진왜란 발발 10개월 전이었는데 즉 1591년 7월  
비변사에서 국방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왜적은 수전에는 능하지만  
육지에서는 민활하지 못하다.  
그러니 육지 방비에 주력하자고 하고  
신립 장군은 수군을 폐지하자고까지 하였고  
또한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이유로  
‘방비 시설을 중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러한 의견 충돌 상황에서 충무공이 분연히 일어나  
해양 방어의 중요성과 수군 활동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던 것이다   


11.從事肥己 如是不願 他日之事 亦可知矣   
(종사비기 여시불원 타일지사 역가지의)  

"자기 한 몸만 살찔 일을 하고  
이런 일은 돌아보지 않으니  
장차의 일도 가히 짐작된다." 

  
1592년(선조 25) 1월 16일 충무공께서  
전라좌수영 관할 장수들에 대하여 검열을 하였다.  
이때는 왜군이 쳐들어 오기 3개월 전으로  
우리 병사들은 언젠가 있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해  
쉬지 않고 전비태세 강화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당답의 군관과 색리들이 마땅히 고쳐야 할  
병선을 고치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벌하여 곤장으로 다스렸다.   
  

12. 各有分界 非朝廷之命 豈宜擅自越境.   
(각유분계 비조정지명 개의천자월경)  

"우리가 각각 책임을 맡은 경계가 있는데  
명령이 아니고서  
어떻게 임의로 경계를 넘을 수 있겠는가." 
  

이순신은 왜적이 야만적으로 기습공격을 하여  
경상도 수군이 대패하였음을 알고  
이제는 전라좌수영이 조선을 지키는  
제1방 어선이 됨을 바로 인식하고  
경상 우수사 원균의 구원 요청을 일단 보류하였다.  
원균의 몇 차례 요청에도 동요하지 않았던  
이순신의 출전 지연 문제는  
그 후 한때 조정에까지 문제로 떠올랐다.  
우의정이었던 이원익은 충무공의 조치 내용을 보고서  
당연한 조치임을 변호해 주었다.  
반드시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때에는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13.勿令妄動 靜重如山   
(물령망동 정중여산)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게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1592년 5월 7일 경상도로 출전하여  
처음으로 전개한 옥포해전을 치르면서 한 말씀.   
  

14. 毋杻一捷慰撫戰士 更勵舟楫爲有如可  
    聞變卽赴終始如一亦   
   (무유일첩위무전사 갱유주즙위유여가    
   문변즉부종시여일역)  

"한 번 승첩하였다 하여 소홀히 생각하지 말고  
위무하고 다시 정비해 두었다가  
변보를 듣는 즉시로 출전하여  
처음과 끝을 한결같이 하도록 하라."  


1592년 6월 14일 제4차 당항포 해전을  
승리하고 나서 한 말씀.   
  

15.臣嘗廬島夷之變 別製龜船 
   雖賊船數百之中 可以突入放砲  
   是 白乎等用良  
  今行以爲突擊將所騎   
{신상여도이지변 별제구선  
수적선수백지중 가이돌입방포  
시 백호등용양  
금행이위돌격장소기) 

"저는 일찍이 왜적들의 침입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별도로 고북함을 만들었는데  
적선이 수백 척이라도 쉽게 돌입하여  
포를 쏘게 되어 있으므로  
이번 출전 때 돌격장이 그것을 타고 나왔습니다." 

1592년 6월 14일 보고한 내용   
  

16. 吾不死 則賊必不敢來犯矣   
(오불사 즉적필불감내범의)  

"내가 죽지 않는 동안에는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할 것이다." 

불의의 일에 대비하여  
비상용 전투식량 1,300석을 비축해 놓으며.   

  
17.輕敵 必敗之理   
(경적 필패지리)  

"적을 가볍게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원칙이다." 

  
1593년 2월 22일 이순신은 이억기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이 있는  
웅천 등지를 공격하며.   
  
18. 憂國之念 未嘗小弛 獨坐蓬下 懷思萬端   
(우국지념 미상소이 독좌봉하)  

"나라를 근심하는 생각조차 조금도 놓이지 않아  
봉창 밑에 앉았으니 온갖 회포가 일어난다." 

  
1593년 7월 1일 인종의 제삿날에   
  

19.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  
是以昨日進陣于閑山島  
以 爲遮按海路之計耳  
(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  
시이작일진진우한산도  
이 위차안해노지계이)  

"호남의 땅은 나라의 울타리입니다.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진을 한산도로 옮겨 진을 치고  
바닷길을 가로막을 계획입니다." 

  
충무공께서 1593년 7월 16일 사헌부 지평  
玄德升[1564년(명종19)∼1627년(인조5)]에게  
보낸 편지 내용임.   
  

20.見小利而入剿 大利不成 姑用停之 乘機剿滅事.   
(견소리이입초 대리불성 시용정지 승기초멸사)  

"작은 이익을 보고 들이치다가는  
큰 것을 이루지 못할 우려가 있으니  
아직 가만히 두었다가 기회를 보아 무찔러야 합니다." 
  
1594년 2월 13일 영의정 유성룡에게 보낸 편지에서.   
  

21.欺罔天聽 至於此極 國事如是 萬無平定之理 仰屋而已.   
(기망천정 지어차극 국사여시 만무평정지리 앙옥이이)  

"임금을 속임이 여기까지 이르니  
국사가 이래서야 매사가 잘 될 수가 없다.  
우러러 탄식할 따름이다."  


1594년 2월 16일 암행어사 유몽인이 장계한 내용을 보고  
암행어사라는 사람이 국가의 위급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눈앞의 얼버무림만 하고 있다며.   
  

22. 與賊相對 勝敗決於呼吸 爲將者不之死 則不可臥   
(여적상대 승패결어호흡 위장자불지사 측불가와)  

"이제 적을 상대하여 승패의 결단이 호흡 사이에 걸렸다.  
장수된 자가 죽지 않았으니 누울 수가 있겠느냐."  


1593년 3월 경 남해에 전염병이 번졌을 때  
공도 병에 걸려 12일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며  
군무를 보니 아들이 휴양하기를 권하자.   
  

23. 三尺誓天山河動色 一揮掃蕩血染山河   
(삼척서천산하동색 일휘소탕혈염산하)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충무공은 1594년 4월 한산도에서  
태구련과 이무생에게 장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고 칼자루에 바로 위의 칼면에  
이와 같은 도명을 한 칼에  
한 구절씩 금상감으로 새겨 두었다.   




24.身居將閫 功無補於涓埃 口誦敎書面有慚於軍旅.   
(신거장곤 공무보어연애 구송교서면유참어군여)  


"장수의 직책을 띤 몸으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며  
입으론 교서를 외우나 얼굴에는  
군인으로서의 부끄러움이 있을 뿐이다." 

   
1595년 5월 29일 일기에서   
  

25. 獨依樓上 念國勢危如朝露  
內無決策之棟樑 外無匡國之柱石  
未 知宗社之終至如 何 心思煩亂終日反側   
(독의누상 염국세위여조로  
내무결책지동량 외무광국지주석  
미 지종사지종지여 하 심사번란종일반측)  

"혼자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형세를 생각하니  
아침 이슬처럼 위태롭기만 한데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인재가 없고  
밖으로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사직이 앞으로 어찌 될지 모르겠다." 

   
1595년 7월 초1일 난중일기에서   

26. 若有心膽 則必自處矣   
(약유심담 즉필자처의)  

"만일 쓸개가 있다면  
반드시 자결이라도 할 일이다."   


1595년 7월 7일 선조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내린 유지를 보고 나서  
참으로 놀랍고도 죄송함을 가눌 길이 없다면서.   
  

27. 深夜使之歡躍非强爲樂也 欲使久若暢申勞苦之計也.   
(심야사지환약비강위락야 욕사구약창신노고지계야)  

"밤이 깊도록 즐거이 뛰놀게 한 것은  
억지로 즐겁게 하려고 한 것이 아니요,  
오랫동안 고생하는 장수들에게  
그 수고를 풀어 주고 싶기 때문이다." 
   

1596년 5월 5일 일기에서   


28. 所經一境 蓬藁滿 目慘不忍見  
姑除戰船之整 以舒軍民之懸.   
(소경일경 봉고만 목참불인경  
고제전선지정 이서군민지현)  

"지나온 지역이 온통 쑥대밭같이 폐허가 되어  
그 참상한 꼴을 눈으로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우선 전선을 정비하는 것이라도 면제해 주어  
군사와 배겅들의 피로를 풀어 주어야 하겠다." 

   
1596년 윤 8월 14일 일기에서   
  

29. 竭忠於國而罪已至 欲孝於親而親亦亡  
天地安如吾之事乎 不如 早死也   
(갈충어국이죄이지 욕효어친이친역망  
천지안여오지사호 불여 조사야)  

"나라에 충성을 바치려 했건만  
죄에 이미 이르렀고  
어버이에게 효도하려 했건마는  
어버이마저 돌아가셨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간에 나 같은 사정이 또 어디 있으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1597년 4월 19일 백의종군하면서  
아산에 이르러  
어머니의 돌아가심을 듣고.   
  

30. 晨昏戀慟淚凝成血 天胡漠漠不我燭兮  
何不速我死也   
(신혼연통루응성혈 천호막막불아촉혜  
하불속아사야)  

"아침저녁으로 그립고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엉기어 피가 되건마는  
아득한 저 하늘을 어찌하여 내 사정을  
이다지도 살펴주지 못하는지,  
왜 어서 죽지 않는지."  


1597년 5월 6일 백의종군 중 꿈에서  
두 분 형님을 꿈에서 보고 나서   
  

31.介峴行來 奇巖千丈 江水委曲且深  
路險棧危 若扼此險 則萬夫 難過矣.   
(개현행래 기암천장 강수위곡차심  
노험잔위 약액차험 즉만부 난과의)  

"개벼리 고갯길을 타고 오는데  
기암절벽이 천 길이나 되고  
굽이도는 강물이 깊기도 하며  
길은 험하고 위태롭다.  
만일 이 험고한 곳을 눌러 지킨다면  
만 명이라도 지나가기가 어렵겠다." 

  
1597년 6월 4일 백의종군 중  
권율 장군의 진지를 찾아가던 곳으로  
현재도 개벼리 개비리 고개로 불리는 곳이다.   
  

32.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 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 臣不死 則賊不敢侮矣.   
(금신전선상유십이  출사력거전 칙유가위야  
전선수과 미 신불사 즉적불감모의)  

"이제 제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있으니  
죽을힘을 내어 항거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록 전선은 적지만 제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1597년 7월 16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패하였다.  
8월 3일 충무공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는데  
12일 후 선조는 선전관 박천봉이를 시켜서  
밀지를 가지고 왔는데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과 합세하여 육전 하라"라는 말에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는 수군을  
없앨 수는 없다며 올린 장계   
  

33.寒山島月明夜 上戍樓撫大刀  
深愁時何處 一聲羌笛更添愁   
(한산도월명야 상수루무대도  
심수시하처 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올라  
큰 칼 불끈 잡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피리 소리,  
이내 시름 더해 주네"  


1597년 8월 15일,  
열선루(전남 보성 관아에 있던 누각)에  
앉아지어 읊음.   


34.昏鼻血流出升餘 夜座思淚 如何可言   
(혼비혈류출승여 야좌사누 여하가언)  

"어둘 무렵이 되어 코피를 한 되 남짓이나 흘렸다.  
밤에 앉아 생각하고 눈물짓곤 하였다.  
어찌 다 말하랴!"  


1597년 10월 19일 일기 중에서  
한 달 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승리하고  
칠천량 패전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었는데  
10월 14일 막내아들 면의 부고를 받았다.  
그 부고를 받는 순간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고 꿈속에서 아들을 본 후  
마음이 심란할 때 일기   
  

35.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  
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 謂矣.   
(병법운 필사즉생 필생즉사  
우왈 일부당경 족구천부 금아지 위의)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한다."  

명량 해전이 벌어지기 하루 전인 1597년 9월 15일  
긴박했던 날 일기에서  
이 말은 『오기병법(오기병법)』의  
「치병편(치병편)」제3장에서 연유된 말이다.  
무릇 전쟁터란 한 번의 실수로  
시체가 되는 죽음의 땅이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살아날 수 있고  
요행히 살려고만 하면 죽게 된다.  
‘一夫當逕 足懼千夫(일부당경 족구천부)은  
진나라 좌사가 지은 촉도부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36.一夫當逕 足懼千夫 爾各諸將 必生則死 勿以生心  
小有違令 卽當軍律 臨戰無退 安衛 欲死軍法乎  
汝 欲死軍法乎 生何所耶 一夫   
(일부당경 족구천부 이각제장 필생즉사 물이생심  
소유위령 즉당군율 임전무퇴 안위 욕사군법호  
여 욕사군법호 생하소야 일부)  

"一夫가 길목을 막아도 千軍이 두려워한다는 길목이  
이곳 명량이다.  
너희들 모든 장수는 각기 살려는 생각이면  
반드시 죽는 것임을 알고  
살 생각을 하지 말라.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면 즉시 군율에 처할 것이다.  
전쟁에서 물러섬이 없어야 한다.   
안위 너는 군법에 죽고 싶냐?  
도망가면 너는 어느 곳에 가서 살 것이냐"   

  

37. 大將不可不和 讐賊不可從遣   
(대장불가불화 수적불가종견)  

"대장으로서 화친을 말할 수 없을뿐더러  
이 원수를 놓아 보낼 수는 없습니다."  


1598년 7월 17일 도요토미 히데요시(1537∼1598)가  
7월 17일(우리나라에서는 8월 18일로 알았다) 죽으면서  
철군을 명하였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비밀리에 철수 이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 부대만 우리 수군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어서 못 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뇌물을 바치고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명나라 진 도독은 그 청을 들어 주려고 하였다.  
그 뒤 몇 차례의 뇌물을 먹은 진 도독은  
결국 충무공께 왜적을 보내주자고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에 진 도독은 부끄러이 여겼다.   
  



38. 此讐若除 死則無憾   
(차수약제 사칙무감)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다."  


1598년 11월 18일 오후 6시경  
왜장 고니시 유니나카가 이끈 적선이  
남해에서 무수히 나와 엄목포에서 정박하고 있고  
또 노량으로 와서 정박하는 배들도 많았다.  
이순신은 명나라 도독 진린과 약속하고서  
이 날 밤 10시경에 같이 길을 떠나  
19일 밤 2시경에 노량에 이르러  
왜적선 500여 척을 만나 아침까지 크게 싸웠다.  
이순신은 전선 약 150척으로  
새로운 각오를 해야만 했고  
이번을 최후의 전투로 장식해야 하겠다고  
굳은 결심을 하고서  
17일 밤 자정에 천지신명께 빌었다.   


39. 戰方急 愼勿言我死 勿令驚軍   
(전방급 신물언아사 물령경군)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군사를 놀라게 해서는 안된다."  


1598년 11월 19일(약력 12월 16일) 이른 아침  
노량 해전에서 적탄에 맞아  
숨을 거두시며 하신 말씀.  



40. 상남자 이순신이 주는 교훈! 

(1545~1598.11.19- 53살의 나이로 노량해전 전사)  
왜적의 침입에 나라를 구하고  
53살의 나이로 전사한 불세출의 명장!  
오직 국가와 백성의 운명만을 생각한 우리의 영웅!  
정치 모략도 가기이방으로 장렬히 스러져간 영원한 리더!  
이순신 장군의 나라와 백성에 대한  
'충(忠)'과 '애민(愛民)'의 진정성은 
400년을 지나 500년이 되어가도  
불변의 진실임을 우리는 압니다. 
그 영웅의 어록 11가지를 되새기다 보면,  
온몸에 전율을 주는 거대한 주인정신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주는 수없이 많고 큰 교훈은 차치하고라도, 
'내 안의 나'를 다스리지 못하고서는  
감히 무슨 일을 한다고 할 수 없음을 통감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