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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olic & Legio

나사렛 예수의 일생과 로마와 기독교

나사렛의 예수, Jesus of Nazareth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예수
나사렛의 예수, Jesus of Nazareth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출생 BC 7경 - 사망 AD 26경

 

그리스도교의 창시자. 기원전 7년경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향인 나사렛 근처를 돌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의 출신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를 평등한 하느님의 자손으로 대했다. 
그의 사후 제자들이 각국으로 퍼져나가며 그리스도교를 전 유럽에 전파했다.

예수는 그리스도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인물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를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여기며, 
이슬람교에서는 그를 선지자 중 한 사람으로 여겨 존경한다. 
힌두교에서도 예수가 크리슈나의 사랑을 받은 아들로 
신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주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왔다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으며, 
마하트마 간디는 예수에게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의 속주였던 비티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가 
112년경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도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를 신처럼 여겨 찬양했다고 나와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고대 그리스 어 '이에수스(Inбuç)'의 라틴 어 표기이며, 
이에수스라는 말은 히브리 어의 여호수와(Jehoschua)를 그리스 어로 옮긴 것이다. 
여호수와의 어원은 접두어 Je-(히브리 어 JHVH/YHWH, Jahveh 야훼, 하느님)와 
히브리 어 Hoshea(구원, 구세라는 뜻)를 덧붙여 이루어진 말이다. 
역사적 실존 인물로 예수를 가리킬 때에는 
흔히 그가 자란 고장의 이름을 덧붙여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른다.

또한 '그리스도(Christ)'라는 낱말은 
고대 그리스 어의 '기름을 부은'이라는 뜻의 
'크리스토스(khristos)'라는 말을 라틴 어로 표기한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이름은 
유대 인의 종교적 예법에 따르면 높은 사람, 
즉 왕이나 선지자, 제사장, 메시아에게 붙이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신자를 두고 있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창시자임에도 
예수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많지 않다. 
대부분은 후대에 쓰여진 복음서에 나와 있는 것이지만 신빙성이 떨어지는 면도 많다. 
역사적 사실로 보이는 부분을 추리자면 
예수의 아버지는 나사렛의 요셉이며, 어머니는 마리아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예수에게 네 명의 형제와 몇 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예수는 당시의 다른 선지자들처럼 백성들을 광야로 부르지 않고 
그들의 거주지를 직접 찾아가 일상적인 생활에 참여했다. 
그는 유랑하는 설교자로서 민중들 가운데서 일했고, 
카리스마적인 기적을 행했으나 요한처럼 세례를 베풀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특별한 회당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가르침을 베풀었다. 
또한 성인 남성들뿐만 아니라 당시 제대로 된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여성, 어린이, 심지어 창녀나 장애인까지 개의치 않고 받아들였다. 
그는 하느님의 실재와 그의 뜻의 정당성을 어려운 말이 아니라 
직접적인 방식으로 제시했고, 
인습적이고 종교적인 관점 없이 청중들을 쉽게 이해시켰다.

그 유명한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비유는 다음과 같다. (마르코 복음 4:1~34)
"자, 들어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서 싹은 곧 나왔지만 해가 뜨자 
뿌리도 내리지 못한 채 말라버렸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나무들이 자라자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것은 좋은 땅에 떨어져서 싹이 나고 잘 자라 열매를 맺었는데, 
열매가 30배가 된 것도 있고 60배가 된 것도 있고 
100배가 된 것도 있었다." (마르4:3-8)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코 복음 4:3-9)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지 그렇지 않을지는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받아들인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 그 결실을 얻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길새먹/흙무돌/빈토사/가고사/ 호토360/ - 길흑빈가호)

성서에 따르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유대의 통치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의 후손으로 한데 모으려 하는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이러한 충돌을 피하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로마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정치적 반란자로 처형당했다. 
그가 죽은 날은 서기 26년에서 32년 사이의 
니산 월(Nissan, 유대력에서 봄이 시작되는 달) 14일, 즉 4월 14일로 추정된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에서는 
그가 죽은 후 부활하여 40일간 지상을 걸어 다녔고 
그 후 하늘로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부활한 예수를 믿음으로써 한데 연합할 수 있었다. 
그 후 서기 70년에서 80년에 이르러 예수의 제자들이 쓴 복음서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예수의 믿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이스라엘 외의 지역에서 전도를 시작하며 
그리스도교는 빠른 속도로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중세에 들어서며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죄와 이에 대한 속죄를 연구하는 데 중심을 두게 되었다. 
신학자들은 예수의 죽음이 인류를 해방시키는 대가로 악마에게 지불된 것이며, 
이로 인해 인류가 영원성을 얻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학과 관련된 결론 없는 논쟁으로 인해 서방 교회는 점차 고인 물처럼 썩기 시작했고, 
신부들 역시 타락하게 되었다. 
결국 중세 시대 후반 유럽 각국에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그리스도교는 여러 개의 종파로 갈라지게 된다.

현재는 수많은 종파들이 각각의 교회를 이루고 있지만, 
이들이 믿는 기본적인 교리는 오래전 예수가 주장했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과 내세에서의 영원한 삶이다.
(출처 - 세계사를 움직인 100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초상.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 최초의 로마 통치자.

 



로마와 기독교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



서양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 기독교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서양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로 해도 될 만큼 
그 영향력을 매우 컸고 고대 유적이나 유물도 존재한다. 

기독교 태동한 초기 기독교는 기나긴 박해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기독교의 시작은 고대 로마제국과 함께 하는데 그 로마에서 기독교는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수많은 이들의 죽음을 당했고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 기독교는 로마에서 종교로 공인되고 국교가 되는 반전을 이뤄냈다. 
고대 로마가 몰락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그 교세를 유럽 전역으로 확장해 서양의 주류 종교로 자리했다. 
기독교의 발전사는 그만큼 극적이었다. 
기독교가 처음 시작된 시기 그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과 중동 지역은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예수가 태어난 1세기 경 로마는 공화정 시대가 끝나고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다.
국가 차원의 황제 신격화 정책은 정복지에도 적용됐다. 정복지마다 신전이 만들어지고 참배를 강요당했다. 
다만, 한 지역은 예외였다.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에 있던 유대 왕국은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가 국교였다. 
그들에게 여러 신을 섬기는 로마의 종교관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대신 유대왕국은 로마 황제의 권위와 신격화를 인정하고 
유대교인들이 스스로 세금을 더 부담하는 등의 방법으로 독자적인 신앙과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로마와 유대교의 문화와 종교가 공존하던 시기 유대 왕국에서 예수가 태어났다. 
예수의 부모는 로마시대 지역의 호구조사를 위해 베들레헴에서도 예루살렘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예수의 모친 마리아가 예수살렘의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았다. 
기원전 시대가 끝나는 사건이었다. 
에수는 모든 이들이 하느님 앞에 평등한 세상을 만들길 주장했다. 
이는 억압받던 민중들에게는 광명과도 같은 말이었다.
특히, 오랜 세월 나라를 잃고 타민족의 지배를 받아왔던 유대민족들에게 
예수는 언젠가 그들 앞에 나타날 메시아였다. 
예수의 주장은 황제에 대한 숭배 거부로 이어졌고 이는 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유대 왕국과 유대교 지도자들에게도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예수는 유대교와의 교리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며 갈등이 커졌다. 
유대교에서는 절대적인 안식일에 대해 예수는 유연한 사고를 보였고 
형식주의 안식일을 비판했다. 
또한, 예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유대교 사제의 존재도 인정하지 않았다. 
기존의 유대교 기득권에 정면으로 맞서는 예수의 존재와 그를 추종하는 세력의 확대는 
유대교 사제들의 큰 반감을 불러왔다. 
유대교 사제들은 예수를 로마 총독에 고발했고 
예수는 로마 총독의 결정에 의해 십자가형에 처해지며 세상을 떠났다. 

예수는 그렇게 순교했지만,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 전해졌고 제자들은 서아시아 교회를 설립하고 
다른 지역으로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기독교는 서아시아를 포함해 여러 나라에서 그 교세를 확대했다. 
로마제국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독교가 확산되던 초기 로마제국은 기독교의 포교 활동에 큰 제한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기독교의 세력이 크지 않았고 황제 권력을 위협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로마의 대표적 폭군인 네로 황제 시기 기독교는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네로 황제는 귀족들을 포함한 반대파를 숙청하면서도 대중적인 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 
집권 초기 그는 폭군의 이미지가 아니었지만, 
로마 대화재로 민심을 잃었다. 당시 네로 황제는 로마가 아닌 타 지역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 그가 로마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급속히 확산했다.
이에 네로 황제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화재 발생이 죄를 씌웠고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처형됐다. 
그중에는 예수의 가장 가까운 제자였던 베드로와 바오로도 있었다.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의 박해였다. 
아직 소수파 종교였던 기독교는 집권층의 실정을 덮기 위한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네로 황제 시대의 박해는 이후 수백 년간 이어졌다. 
이런 박해는 로마제국의 통치이념에 부합하지 않는 기독교의 교리도 원인이었다. 
기독교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한편 평등을 강조했다. 
그 안에는 로마를 지탱하는 노예제와 극심했던 남녀 차별의 철폐도 포함되어 있었다. 
금욕적인 삶을 강조하는 교리는 당시 로마 청년들 특히, 
여성들이 원치 않는 혼인을 거부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로마 사회의 분위기와 정면으로 배치는 것이었다. 
또한, 기독교의 교리는 로마 사회 전반에 번져있던 쾌락주의와도 큰 거리가 있었다. 
이는 로마 권력층이 점점 기독교에 반감을 가지게 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황제 숭배를 거부하는 건 반역의 죄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질감은 기독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로 이어졌다. 
기독교는 로마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종교로 불법화되고 
기독교인임이 드러나면 중형으로 처벌받았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순교의 길을 걸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절정에 이른 시기는 
235년부터 284년까지 이어진 군인 황제 시대였다. 
하지만 기독교의 세력은 줄어 들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갔다. 
이에 기독교는 황제의 성향에 따라 
박해와 묵인 사이에서 불안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한 박해는 점점 힘을 잃었다. 
박해를 받으면서도 성장한 기독교는 다수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종교로 성장했고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했다. 
로마 황제도 기독교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기독교 역사의 큰 전환점은 콘스탄티누스 1세(274-337) 황제 시기였다. 
그는 치열한 권력 투쟁의 과정을 이겨내고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로마의 지배권을 놓고 대결한 내전 당시 
그의 군대는 기독교 표식이 있는 방패를 들고 전투에 나섰다. 
설화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전해지지만, 
당시 기독교 세력이 커졌고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 세력의 지원을 받았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를 보다

 


그렇게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 1세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다. 
박해의 시대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이후 기독교는 큰 부흥기로 접어들었다. 
마침내 392년 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했다.
 박해받았던 종교가 주류 종교가 되는 일이었다. 
당시 로마제국에도 기독교 신자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기도 했다.
이렇게 주류 종교가 된 기독교는 오히려 타 종교를 박해하는 종교가 됐다. 
기독교가 지배하는 로마에서는 과거 그들의 전통 속 신들이 있었던 
모셔진 다수의 신전들이 파괴되고 기독교 외 이교도들의 행사가 금지됐다.
그만큼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의 영향력을 막대했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유럽을 중심으로 
서구 문화의 구심점이 됐고 기독교의 세계관이 유럽을 지배했다.
( 395년 로마는 동서로 분할되어,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고
1453년 니케아제국의 동로마도 멸망)
중세 시대 기독교는 정치, 경제 전반을 지배했고 권력자로 자리하기도 했다. 
기독교의 교리가 일반 국민들의 삶을 통제하고 
봉건 영주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심지어 면벌부를 발행해 그들의 권위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기도 했다. 
이런 교회의 부패와 타락은 종교개혁이라는 내부 개혁과 교회 분열로 이어졌다.

기독교의 발전사는 분명 고통과 박해의 역사이기도 했지만, 
박해를 벗아난 이후에는 누군가를 박해하고 억압하는 역사이기도 했다. 
이는 종교가 종교로서의 기능을 벗어났을 때 
어떤 부작용과 폐해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