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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의 백제미륵사지석탑을 통해보는 우리의 역사!

백제의 익산미륵사 모형도

 

 

익산의 백제미륵사지석탑!


역사를 통해 우리들은 과거를 알고,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1400여 년 전에 만들어진 국보 제11호
익산미륵사지석탑!
미륵사는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번지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사찰였으나 지금은 사찰은 없어지고,
서탑과 동탑, 그리고 사찰의 주춧돌과 
그때의 절터만을 볼 수 있습니다
백제 말기의 전북 익산 미륵사지석탑에 관한 내용입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 개요와 역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97의
미륵사는 무왕(재위 600-641) 대에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입니다.
일반적으로 이곳이 절터였다는 사실은 모르고
석탑만을 떠올리게 됩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의 강력한 국권을 위한 절이었으나 
지금은 사찰은 없어지고,
서탑과 동탑, 그리고 사찰의 주춧돌과 절터만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일은 선화공주와 서동의 로맨스에 관한
서동요가 사실이 아닌 설화였다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기존에는 고려 시대 일연의 삼국유사를 기반으로 
'미륵사는 무왕의 왕비 서동요의 주인공이었던
 '선화 공주'의 발원에 의해 
용화산 아래 건립됐다'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서동요-"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밀어 두고(밀통하고),
서동을 몰래 밤에 안고 간다.")
그러나 석탑 해체 중 내부에서 발견된 봉안 기록에 따르면 
실제 미륵사는 백제 대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 왕후가 건립을 발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서동요가 사실이 아닌 설화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미륵사는 조선시대에 폐사(廢寺) 된 뒤 
3기의 탑 가운데 목탑과 동 금당의 석탑은 소실되었습니다.
현재의 동쪽 석탑은 1993년에 복원한 것입니다.
서 금당의 미륵사지석탑은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639년으로  명확하게 밝혀져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탑입니다.
원래 9층이었으나 미륵사가 폐사된 뒤,
원형이 크게 훼손되어 6층까지만 남았습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에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을 
콘크리트로 덧씌운 채로 그나마 보존되었습니다.
복원 과정을 보면 1998년 구조 안전진단을 시행하여
이듬해에 해체 및 보수를 결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2001년 10월부터 정비 작업을 시작하여
2018년 6월에 드디어 예전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20년 만에 길고도 지루한 복원작업이 마무리된 셈입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 규모와 해체 및 발굴

 

 

 

2001년 본격적으로 해체 보수정비 작업에 착수한 뒤
일제가 콘크리이트로 보수한 것을,
3년간 해체한 콘크리트 양만 185톤에 달했다고 합니다. 
2009년 해체보수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첫 번째 심주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리공 안에서 금제사리호와 유리 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등 
9600여 점의 유물과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었습니다.
당시는 유리가 금이나 은보다 귀한 물건이었기에
1mm 정도의 구슬 같은 유물도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선화공주와 관련된 자료로 탑지에 따르면 
639년 무왕 즉위 39년에 백제 대귀족인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사택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며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석탑의 건립 연도가 밝혀졌습니다.
무왕의 왕비는 신라의 공주가 아닌
백제 귀족의 딸이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은 지금은 사찰의 터만 
덩그러니 남은 상태입니다.
거기에 북원과 준공을 거친 두 개의 석탑이 있습니다.
1990년 중반에 둘러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의 보수로 인해 흉물스러운 가운데
탑 내부를 일부나마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20여 년 만에 복원된 동 탑은 실내를 볼 수는 없고 
외부에서나마 원형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익산미륵사지석탑은
백제시대 미륵사에 세워진 3기의 탑 가운데 
서쪽에 있는 석탑과 동쪽의 동 탑입니다. 
국내에 현존하는 최고 최대의 석탑으로서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1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복원 이전에 남아 있던 6층의 서남쪽 부분은 유실되고
북동쪽 부분을 중심으로 절반가량만 남은 상태였습니다.
높이는 14.24m였습니다.
석탑의 층수는 종전까지 7층 설이 지배적이었으나,
발굴 조사 때 동탑지에서 출토된 노반석과
지붕돌을 서탑과의 비례를 바탕으로 계산하여 복원한 결과 
원래 층수는 9층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총높이는 신라의 석탑 중 가장 높은 
감은사지 3층 석탑(13m)의 2배에 가까운
24m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위대한 역사속의 미륵사지석탑!


1400여 년 전에 어떻게 24m나 되는 높이의
석탑을 지을 수가 있었을까?
목조건물이나 탑은 이해가 되나
무거운 석탑의 경우는 경이로울 뿐입니다.
아울러 2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예전의 모습을
완벽하게 복원시킨 기술에도 그저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정체성과 자긍심을 갖게 하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특히나 어린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서동요가
사실이 아닌 설화임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우리의 역사, 
20년 만에 복원된 
백제의 익산미륵사지석탑 방문 영상!

 

▶ https://youtu.be/jn6dyWmLL6M